무덤 위에 세워진 마을
바로 부산 아미동에 위치한 비석마을입니다. 마을의 좁고 경사진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담벼락 곳곳에 비문이 새겨진 비석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입니다. 마을 곳곳의 계단, 담장 등에서 일본인의 비석을 쉽게 발견할 수 있죠.
심지어 비석을 건물 지반으로 활용하거나 물건을 올려두는 받침대로 사용하고 있는 광경도 종종 마주칠 수 있습니다. 비석문화마을은 1950년대 피난민들이 일본인 공동묘지가 세워진 마을에 정착하면서 형성됐습니다. 당시 일부 비석은 아미동 대성사 내에 있는 추모공간에 옮겨졌으나, 대부분은 마을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이 같은 비석은 계단이나 담장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에서도 발견될 정도죠. 아미동에 오랜 세월 거주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후 일본인들은 비석을 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선조들의 비석이 담벼락이나 건물 주춧돌로 활용된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공동묘지의 자리는 온데간데없고 비석들만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뼈아픈 역사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 이름만 들으면 섬뜩한 기운이 돌지만 아미동은 전쟁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군인들의 시신을 아미동으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아미동은 한동안 공동묘지로만 남아 있었죠. 그러다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살 곳을 찾아 몰려오면서 마을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집을 지을 건축 자재가 마땅하지 않던 시절 피난민들은 비석과 상석을 이용해 건물 기초를 세우고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시신이 매장된 땅 위에 터전을 잡는다는 일은 생각만 해도 음산한 기분이 들지만 당시 피난민들은 이외 요소를 고려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거처를 내어준 데 대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에 이곳 주민들은 수시로 비석 앞에 물 한 그릇 떠놓고 영혼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혼령을 위로하는 백중날에는 인근 절에서 단체로 일본인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죠.
오늘날 여행 명소로 탈바꿈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뼈아픈 근대의 역사가 하나의 여행 명소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마을버스도 힘겹게 돌아 올라갔던 좁고 경사진 골목은 도로가 확장되었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던 건물 외벽들은 산뜻한 회화로 덧칠되었습니다. 따라서 비석문화마을에서는 골목 곳곳에서 벽화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곳곳에서 비석의 자취를 찾아볼 수도 있죠.
사실 비석문화마을의 매력은 단지 마을 곳곳에 있는 비석과 근대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높은 산기슭에 위치한 덕분에 자연스럽게 부산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데요. 구름이 쉬어가는 전망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문객들에게 훌륭한 쉼터가 되어 줍니다.
밤이 되어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대에 올라서 야경을 바라보면 부민동과 아미동 일대 그리고 멀리 자갈치시장, 남포동, 영도 일대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또 마을 안에 사진작가 최민식의 갤러리가 자리해 함께 둘러볼 수도 있는데요. 비석문화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감천문화마을도 자리하고 있어 아울러 방문해봐도 좋습니다.
비석 전수조사에 나서
지난해 비석문화마을의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서구청은 비석의 전수조사에 나섰습니다. 이곳에 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지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나 비석에 대한 연구 및 조사가 부족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인데요. 구청 관계자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비석을 전수 조사하고 기록해 향후 관광 콘텐츠 개발에 활용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또 비석 조사를 통해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덧붙였죠.
한편, 비석문화마을은 감천문화마을처럼 개방성을 지닌 마을이 아닙니다. 전쟁과 피난이라는 상황 속에서 무덤 위에 터전을 꾸린 이들의 살아가고 있는 삶의 공간이므로 예의를 갖춰 조용히 다니는 것은 필수인데요. 삶의 골목을 거니는 게 부담스럽다면 마을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인 아미문화학습관이나 기찻집 예술체험장 등을 방문하길 권장합니다.